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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오의 인생극장]서양화가 모지선, ‘1000호 유화’로 만개- 스포츠경향

작성자
artimomo
작성일
2016-02-24 21:26
조회
1774

[카메오의 인생극장]서양화가 모지선, ‘1000호 유화’로 만개



입력: 2007년 07월 20일 20:38:02






모지선 화백의 1000호 대작 '仙飛 A'

중견 서양화가 모지선씨(57)는 전업 주부로 지내면서 회화를 독학으로 익혔다. 1986년 화단에 입성, 20여년간 자신의 화풍을 다졌다. 그가 10번째 개인전을 연다. 5년 동안 공을 들여 최근 완성한 1000호짜리(705×235㎝) 대작 ‘선비(仙飛) A’를 비롯해 ‘꿈’ 등을 선보인다. 오는 25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인사동의 갤러리 라메르에서. 경기도 양평에 있는 화실에서 만난 그는 수더분한 ‘부산 아지매’였다. 자신의 그림 ‘선비’(仙飛) 속의 아름답고 강한 여인을 꿈꾸는 ‘장이’였다.




#또 하나의 서북성(西北城)

경기도 양평군 회현2리. 모지선씨의 화실은 이곳의 ‘안골’이라는 데에 있다. 10가구 정도가 듬성듬성 자리해 있는, 엄마의 품처럼 포근해 보이는 마을이다. 그가 이곳에서 사계절마다 각기 다른 정취를 뽐내는 논밭과 들녘과 동산, 비와 눈과 바람을 벗삼아 작업을 한 지 올해로 7년째를 맞았다.

“서울 가서 살림을 살고 볼 일을 볼 때 외에는 여기에서 지내요. 주말에는 남편이 와요.”

가장 즐겁고, 고통스럽기도 한 시간은 작업을 할 때. 이 시간의 심경은 그가 1997년 10월에 발간한 시집 ‘門 이야기’의 첫번째 시 ‘서북성’(西北城)의 한 연에서 읽을 수 있다.

“강처럼/ 차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고/ 고지서처럼/ 어둠은 찾아온다/ 내몸 서서히/ 뚝뚝 떨어지는/ 피빛 고통을 받은/ 아픔을/ 누가 지켜봐다오.”

‘서북성’은 그의 화실이 있던 서울 영등포의 한 빌딩 이름(서북)에 기인한다. 자신의 꿈을 잉태한 성(城)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회현2리에 있는 화실 ‘모 갤러리’는 환경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서북성이다. 그는 “창작의 고통과 희열이 배인, 5년여 동안 매달린 꿈이 영근 산실”이라고 소개했다. 이번 개인전의 대표작인 ‘선비(仙飛) A’에 대해 “‘선비’는 여인의 이름”이라며 “아름답고 강한 힘을 가진, 저의 뜻과 마음을 시공을 초월해 전해주는 전달자(messenger)”라고 설명했다. “나의 아름다운 메신저인 선비는 천년 세월도 단숨에 넘나드는 빛이요 바람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파리에서 공부했지?”

1993년 11월, 그가 네번째 개인전을 가질 때 일이다. 전시회를 찾은 몇몇 원로 작가가 그에게 “파리에서 공부했느냐”고 물었다. 해외 유학은커녕 국내 대학 미대도 졸업하지 않은 그는 뜻밖의 물음에 충격을 받았다. 나름대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알게 모르게 유럽 그림에 젖어 있던 것이다.

“그때부터 전통 회화를 공부했어요. 회화의 역사성에 관심을 갖고 뿌리를 찾는 작업을 했죠. 문학과 철학공부를 병행했고요.”

그러던 중 고분벽화를 만났다. 고분벽화에 회화와 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걸 발견, 자신의 작품세계와 연계시켜 자신의 화풍을 구축하는 작업을 15년 동안 했다. ‘선비(仙飛) A’ 등은 이 작업의 결실 가운데 하나다.

“시작한 게 2002년이에요. 대작인 만큼 작업과정이 쉽지 않았죠. 2년 전 그리스 여행 때 의문이 풀려 지난해까지 미완성인 채로 남겨뒀던 그림을 최근에야 완성했어요.”

여행 당시 그는 신화와 역사가 하나로 녹아 있는 곳곳의 유적에 놀라움과 감동을 받았다. 그림을 그릴 때 막혀 있던 의문은 여행이 끝날 무렵 아테네의 상점에서 흙으로 빚은 인형을 발견하면서 풀렸다.

“머리는 여인이고 몸은 새였어요. 늘어뜨린 길고 검은 머리, 희고 갸름한 얼굴 아래 날개를 접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고구려 고분벽화의 여인이 떠올랐어요. 두 여인의 형상이 거의 같은 모습인 데에서 인간의 마음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비록 한스러운 짧은 생을 마감할지라도 힘이 있고 신령스러운 존재의 힘을 빌려 그 마음을 전하고 싶은 거예요.”

#우연한 동행, 순간의 선택

그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꿈은 피아니스트·성악가 등. 고2 겨울방학 때 우연히 만난 친구를 따라간 미술학원에서 그냥 기다리는 게 무료해 친구를 따라 데생을 했는데 원장이 소질이 있다면서 그림을 권유했던 게 화가를 지망한 계기가 됐다.

대학은 음대생인 언니를 따라 숙명여대에 진학했다. 당시 숙대에는 서양화과가 없어 응용미술과에 진학했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어야 했고, 수업시간에 자수를 배우는 등 그가 생각하던 미대가 아니어서 대학생활에 회의가 밀려왔다. 그런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 3학년 때 대학을 그만두었다.

“딸과 아들을 낳고, 살림을 살면서 공무원인 남편을 따라 지방을 전전했어요. 스물다섯살 때 우연히 고갱의 그림과 서머셋 몸이 그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는 ‘달과 6펜스’를 읽고 다시 그림에 도전했죠. 남편이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예요.”

그림 공부는 혼자 했다. 다시 시작한 지 10여년 만인 1986년 구상전(문예진흥원 주최)에서 특선을 차지한 뒤 10년에 걸쳐 두번 더 특선을 차지해 회원이 됐다. 현재 구상전을 비롯해 한국미술협회·영토회·서울-북경 수채화회·Always 누드크로키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43개국 600여명이 2001년 이탈리아 피렌체 비엔날레 페인팅 부문에서 5위를 차지하는 등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그에 대해 미술평론가 김남수씨는 “전통적인 한국인의 색채와 문양, 세계의 예술양식과 접목하고 공존할 수 있는 표현주의적인 조형언어가 돋보인다”면서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표현주의 성향의 중견작가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주부로 지내면서 포기하지 않고 작업을 계속해온 데 자부심을 느껴요. 저에게 작품활동은 살아가는 목표이며 외부와 소통하는 매개체예요. 앞으로도 그림을 그리고, 작품설명을 직접 쓰고, 시도 계속 쓸 겁니다. 저를 만족시키고 즐기면서 이웃과 소통하고 싶어요.”

〈글 배장수 선임기자·사진 이석우기자〉